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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환희

- 정해숙씨의 <투영> 연작 -
 

하늘의 별을 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한 치도 벗어남이 없이 태초부터 그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자기 궤도를 일탈하지 않고 묵묵히 정해진 행로를 걷는다. 무수한 별들이 질서를 지켜왔기에 오늘과 같은 우주가 있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별들이 질서를 지키는 모습은 아름답기만 하다.

정해숙씨의 그림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네모와 세모, 막대와 색띠로 이루어진 수많은 면들이 모두 질서정연하게 제자리를 지키며 도열해 있다. 이웃해 있는 면들과 다투거나 경쟁하지 않고 오히려 인접 면을 도와주고 전체의 통일성에 이바지한다. 정해숙씨의 작품은 이처럼 ‘질서의 미’를 새삼 일깨워준다.

여느 기하학적 추상화와 달리 정해숙씨의 작품은 냉랭하거나 무표정하지 않고 생명의 물결로 넘실거린다. 색깔은 춤추듯 경쾌하고 색깔끼리 사이좋게 어울리는가 하면 기하학적 이미지들도 감미롭게 들려오는 곡선의 선율에 맞추어 스텝을 밟는다. 푸르른 바다, 강열한 빛과 그 빛이 물 위로 반사될 때의 눈부심, 시원스레 뻗은 수평선과 그 위를 훨훨 나는 새가 시야에 들어온다. 색깔은 화사하고 리듬은 흥겹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순결하고 청아하다.

그의 작품은 하얀 백사장, 끝없이 펼쳐지는 수평선, 드넓은 창공을 연상시킨다. 이런 이미지는 그의 해외체류와 관련이 있다. 정해숙씨는 수년간 가족과 함께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에 머문 적이 있다. 거기서 아름다운 풍광(風光)을 접할 기회를 가졌다. 사철 푸른 열대의 나뭇잎과 연보랏빛 난초들, 수많은 예쁜 꽃들, 시원하게 뻗은 야자수들, 그리고 남태평양의 철썩이는 파도와 반짝이는 모래사장에 흠뻑 매료되었었다. 그의 그림을 밝게 물들이는 터키, 블루, 바이올렛 색상들은 열대의 자연을 연상시키며 그곳의 깨끗함, 인공의 발길이 닿지 않은 원시성, 자맥질하는 생명의 호흡을 읽게 해준다.

일찍이 이일 선생님은 작가의 작품특성을 기술하며 정곡을 짚었다.

“화면의 구성요소로서의 대비적 관계, 그것은 또 한편으로는 극소와 극대, 부분과 전체와의 그것이다. 그리고 이 양자는 서로 겹치고 또 스스로 증폭되어 가면서 일종의 다중적인 공간을 형성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평면적이자 동시에 이중 삼중의 깊이 있는 공간이며 정신적 투영으로서의 투명한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엄밀하고도 정연한 내재적 리듬에 의해 통제되는 공간이다.”(1992)

이 말은 지금도 유효한 것같다. ‘정신적 투영의 공간’의 특성을 작가는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단순히 기계적인 행위가 반복되는 추상작품이 아니라 정신적 투명의 공간, 즉 영혼의 소망을 함축하는 공간이다. 작가 자신의 마음 밑바닥에서 고동쳐 우러나온, 영원한 생명의 항구로 들어가려는 바람이 묻어난다.

근래 정해숙씨는 아기자기한 면분할과 함께 공간을 적당히 남기는 공간할애를 시도하고 있다. 빈 공간은 밝은 색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투명성이 간직되어 있다. 여백을 더 많이 줌으로써 비가시적 존재를 강조하고, 그리하여 영혼의 실재를 담아내려고 한다.

정해숙씨의 작업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성실한 장인적인 근성이다. 하나하나의 작품마다 정성을 기울여 제작된다. 어떤 것은 6개월씩 걸리고 보통 소품을 하더라도 1개월 이상씩 소요된다. 그에게는 ‘대충’ 이란 것이 없다. 면하나 색깔 하나에게 각별히 주의를 기울인다. 세심함이 조각조각 모아져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고 마침내 전체를 이룬다. 그가 사용하는 유채(oil)는 뻑뻑해서 매끈한 표면채색을 하기에는 힘든 재료적 속성을 지닌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우려를 무색케 한다. 유채를 잘 길들여 마치 수채나 스프레이로 한 것처럼 자유자재로 다룬다. 그가 얼마나 능숙하게 재료를 소화시키고 있는지를 반증해주는 결과이다.

조심스럽고 신중한 작업과정을 거쳐 비로소 탄탄한 짜임새의 작품이 탄생된다. 서두르지 않는 인내와 침착함,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섬세한 붓질이야말로 그림의 성패를 가르는 관건이 된다. 그가 공들인만큼 우리의 시선도 그의 화면에 오래 머무른다. 장인적 철저성이 그의 작품을 한층 공교롭게 만들고 있다.

각 면은 치밀한 계획과 깔끔한 마무리의 채색에 의하여 지탱된다. 색을 칠하다가 옆으로 흐트러지면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의 조화를 해치기 쉽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긴장상태를 유지한다. 행동의 멈춤에서 그림이 시작되고 정서적 평형상태에서 붓질이 가해지기 시작한다.

그의 작품에서 그냥 지나칠 없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오묘한 빛의 감응이다. 그의 작품은 빛의 물결로 출렁인다. 태양이 잔잔한 호수에 반사될 때처럼 무수한 빛의 조각들이 화면에서 흘러나온다. 빛의 파편들이 불꽃놀이처럼 밤하늘을 환하게 비춘다. 폭죽처럼 터질 때마다 작은 면들은 영롱한 색깔로 자태를 뽐내며 큰 장관을 이룬다.

<사랑의 하나님>,<꿈꾸는 섬>,<새벽기도>,<좁은 문>,<은혜의 강>,<생명의 강>,<사랑의 예수님>,<부활> 등은 다이아몬드처럼 다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십자가, 창문, 하늘에서 빛이 쏟아져 나올 뿐만 아니라 각면에서도 흰빛이 나온다. 만일 십자가,창문,하늘에서 나오는 빛이 원형이라면, 각면에서 나오는 빛은 원형을 반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실재와 환영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각 면은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다. 그러나 그 면도 빛을 받으면 얼마든지 빛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햇빛이 작열하듯이 눈이 부시다. 중앙에 들어갈수록 흰 빛이 유출되고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빛에서 멀어진다. 꼭 가운데가 아니더라도 빛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나 중앙이 된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선 중앙과 주변의 구분이 따로 없다. 어디에 빛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곳이 출발점이고 생장점이다.

근작을 보면, 화면 하단이 빛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은혜의 강>,<생명의 강>,<사랑의 예수님>,<꿈꾸는 섬>,<부활>,<구원>,<아름다운 땅>에서 보듯이 세모꼴로 가옥모양을 한 하단은 빛에서 멀리 떨어져 희미하거나 침침하다. 그 자리야 말로 빛이 내려야 할 처소임을 암시한다. 화면에서 하단은 지상, 곧 이 세상을 의미한다. 신음과 고통소리가 하루도 거르지 않는 이 땅이야말로 충만한 하나님의 은총이 정말 필요한 곳이다. 여전히 어둠에 짓눌려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 밤의 지배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 지상은 겨울의 엄동설한에 빠져 있다. 따듯한 빛, 그리고 그 빛에서 나오는 열기가 있어야 비로소 추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처럼 빛은 정해숙씨에게 아주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그 빛은 과연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그가 나타내는 빛은 보통 광선이나 물리적인 조명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물감에서 나오는 빛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 빛은 말하자면 ‘영적 광채’를 나타내는 것이요 이 광채의 임재를 경험할 때에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심령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순수한 영혼이 순수한 작품을 낳는다. 신령한 마음이 있어야 신령한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나타낼 수 있다. 영혼의 눈이 열려야 영원의 도성과 생명의 빛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의 그림이 우리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은 종교적 도상을 사용해서도 아니다. 바로 빛이신 예수님과의 깊은 사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귐을 통해 정해숙씨는 천상의 세계, 어떤 보석보다 휘황찬란하고 모든 즐거움이 집중되고 광채가 태양빛을 능가하며 가장 아름다운 꽃보다 더 아름다운 그 분의 나라를 나타낸다. 곧 가장 빛나고 영화로운 세계를 응시하고 또 거기에 즐거이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셈이다. 그의 작품은 가장 빛나고 영화로운 나라의 모형이다.

 

2005.4.25

서성록(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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