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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숙, 구도자의 시선, 소망의 무지개

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

 

풍부한 암시성

 

쳇바퀴 도는 일상에서 벗어나 ‘엘도라도’나 ‘생그릴라’같은 아득한 신비의 나라를 찾아나서는 것은 몽상으로 치부되지만 이는 누구나 내면에 깊은 갈망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과 평화가 넘치는 세상, 고통과 슬픔같은 비극이 존재하지 않는 멋지고 놀라운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그런데 우리 속에 잠재된 이런 갈망을 북돋아주고 일깨워주는 것이 예술이 아닌가 싶다. 정해숙은 그런 동경을 줌렌즈처럼 당겨서 보여주는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우리가 찾아야할 것이 무엇이고 소망의 귀착지가 어디인지 확인시켜준다.

 

정해숙의 작품에서 마주하는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 드넓은 창공과 보석처럼 반짝이는 물결 등의 이미지는 그의 해외 체류와 연관이 있다. 작가는 남편을 따라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에 수년간 거주한 적이 있다. 주말이면 인근에 있는 청정지역인 바다로 나가 배를 탔는데 거기서 접한 남태평양의 바다와 파도의 출렁임, 새파란 하늘이 그의 작업에 밑거름이 되었다. 작가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풍광을 보며 경이와 전율을 느끼는 동시에 여유와 행복감을 누렸다. 그의 그림을 밝게 물들이는 코발트 블루, 터키, 에메랄드, 바이올렛 색상들은 열대의 자연을 연상시키며 싱그러운 아름다움, 생명의 호흡을 읽게 해준다. 순도높은 색상과 빛이 반사될 때의 찬란함은 이때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평론가 이 일(李逸)은 그의 작품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 바 있다.

 

“화면의 구성요소로서의 대비적 관계, 그것은 또 한편으로는 극소와 극대, 부분과 전체와의 그것이다. 그리고 이 양자는 서로 겹치고 또 스스로 증폭되어 가면서 일종의 다중적인 공간을 형성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평면적이자 동시에 이중 삼중의 깊이 있는 공간이며 정신적 투영으로서의 투명한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엄밀하고도 정연한 내재적 리듬에 의해 통제되는 공간이다.”(1992)

 

이 글은 그의 그림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파악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큰 틀에서 극소와 극대, 부분과 전체의 대비가 이루어지며, 두 요인이 엇물리고 나뉘면서 화면을 촘촘히 직조해간다.

 

그의 작품은 일반적인 추상작품과 다르게 강한 암시성을 띠고 있다. 하얀 새가 창공을 가르며 춤추고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과 십자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찬란한 빛 등 암시적 이미지들을 화면 곳곳에 장치해놓았다. 그가 암시하는 것은 기독교 영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를 통해 충만한 광채와 경이로움으로 둘러싸인 장차 다가올 세상을 흐릿하게나마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를 보면 그가 왜 추상이란 조형어휘를 구사하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주님의 나라의 상상하는데 그것이 적절한 언어가 될 수 있다고 여긴 것이 분명하다.

 

충일한 영감의 무대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코르테즈 바다에 관한 항해일지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해양 생태학자인 리켓(Ricketts)과 소설가 존 스타인벡이 함께 여행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책에서 존 스타인벡은 일몰시 조수웅덩이를 두리번거리다가 한 어부노인에게 무엇을 찾느냐고 질문을 받는다. 이때 존 스타인벡은 “우리는 우리에게 참된 어떤 것을 찾고 있습니다. — 우리는 모든 생명의 패턴에 깊이 헤아릴 수 있는 원리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탐색하고 있답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적어도 스타인벡에 있어 예술행위를 한다는 것은 그저 소일거리가 아닌, 진리에 이르는 길을 묻는 여정으로 인식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 우리는 흔히 구도자(Seeker)로 부른다.

 

존 스타인벡과 마찬가지로 정해숙도 ‘진리를 찾아가는 작가’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참된 것은 무엇이고 어떤 삶의 형태를 가져야하는지 묻고 답을 찾기 위한 탐색을 이어왔다. 그의 이런 경향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친 개인전을 통해 입증된 바 있다. 그러나 구도자의 입장이 뚜렷해진 것은 아마도 2002년 인사갤러리의 개인전과 2005년 인사아트센터의 개인전에서 두드러진다. 그후에 가진 CJ 갤러리(2006), 인사아트센터(2006),러시아 작가연맹갤러리(2007), 서울미술관(2008),밀알미술관(2012)에서의 개인전에서도 “시종 밀도 있는 질감의 유채로 일관한 순도높은 투명성”(이 일)을 지닌 회화를 선보인 바 있다.

 

정해숙이 일관되게 유지해온 작품양식은 섬세하면서도 명료성을 지닌다. 소단위의 무수한 색면(色面) 분할로 시각적 효과를 일으키고 중첩된 색면은 내재적인 리듬과 함께 환영적인 공간을 낳는다. 물론 이런 공간은 단 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누적과 치밀한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다. 대개 기하학과 면을 자주 이용하는 작가들이 질서와 규율에 얽매어 자유스러움을 잃어버리는 데 반해 정해숙은 오히려 이런 한계를 뛰어넘는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이 점은 그가 추구하는 의미의 층위를 살펴볼 때 설명될 수 있으리라 본다.

 

치유의 바다

 

<치유의 바다>(그림 1)는 2천여 년 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될 때에 지중해에서 만난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도 멜리데 섬에 구조된 것처럼, 주님의 끝없는 사랑과 은혜로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구원하여 주시며, 치유하여 주시며, 나아갈 길을 인도해 주시고 새 힘으로 모든 것을 극복해내고, 천국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길 소망하는 마음을 담은 작품이다.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고 한다. 1994년 말레이시아에서 근무하던 남편이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사경을 헤맬 때 작가는 요한복음 12장 46절의 말씀을 체험할 수 있었고, 그 뒤로 예수님의 사랑을 꾸준히 작품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25년이 흘렀건만 작가는 변함없이 말씀묵상과 설교, 찬송 중에 주시는 영감과 지혜를 캔버스에 담아오고 있다. 기적적인 치유에서 시작한 그의 작품은 간증의 차원을 지나 이제 주님께 대한 찬미로 바뀌게 되었다.

 

빛으로 오신 주님을 그림 한 가운데 밝은 부분의 하이라이트로, 우리를 위하여 피흘리신 주님의 긍휼하심은 화면 중앙의 눈물방울로, 화면 바탕의 커다란 원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득한 곳에 자리한 삼각형은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섬을,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은 날개를 펼치고 훨훨 나는 하얀 새의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치유 – 베데스다>

<치유 – 베데스다>(그림 2)는 요한복음 5장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38년간 중풍병을 앓은 병자가 베데스다 연못에서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것을 주제로 하고 있다. ‘치유’가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7년전 작가 자신이 갑상선암 진단을 받고 고생하다가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투병 기간중 병원을 오고가면서 힘든 환자들을 보게 되었고 그들의 눈물과 한숨을 지켜보며 베데스다 못가에서 중풍병자를 치유해주신 주님이 저들의 병을 고쳐주시길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

 

그림은 크게 상단과 하단으로 구별되는데 하단의 네모꼴 안의 동그라미는 그곳이 베데스다 못임을 나타내고 그곳에서 치유의 샘이 솟아오르는 것을 암시하는가 하면 로마자 ⅩⅩⅩⅧ 은 38세 된 중풍병자의 나이를 표시한다. 반면 상단에는 장막 사이로 찬란한 빛이 비추는 사이 몇 마리의 새가 활기차게 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여기서 빛은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새의 이미지는 위로의 성령님을 각각 나타낸다. 화면에는 눈물방울이 매달려있는데 그것은 작가가 지인들의 치유를 위하여 기도를 드릴 때 그와 함께 눈물을 흘리신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십자가의 주님은 언제나 끝없는 사랑의 마음으로 보석처럼 아름다운 눈물을 흘리셨다”고 적고 있다. 이 작품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섰을 지라도 예수님이 우리의 산성이시고 인도자가 되심을 나타내고 있다.

 

<생명나무>

 

<생명나무>(그림 3)는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에 각각 등장하는 ‘생명나무’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큼직한 나무 한그루를 중심으로 주위의 여러 이미지들이 우리의 눈길을 잡아끈다. 말하자면 작가는 화면에 여러 상징적인 이미지를 접목시켜 중층적인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테면 나무에 달린 열매는 성령의 9가지 열매(갈라디아서 5장)이며, 나무기둥은 천국에 이르는 야곱의 사다리, 화면 하단은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하는 시냇물(시편 1:3)과 비옥한 땅을 각각 볼 수 있다. 그림 상단에는 장막이 갈라지면서 광명한 빛이 쏟아지고 그 곁을 성령님을 상징하는 하얀 새들이 주위를 날고 있다. 생명나무에 주목해서 보면 창세기의 장면을 떠올리게 되지만 이 작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할 때 복된 삶을 누리게 되리라는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함께 지니고 있다. 좌측의 헌신의 항아리는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옥합을 예수님께 내놓았듯이 우리의 시간과 물질, 재능을 담은 향유옥합을 예수님께 드려야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곳곳에 ‘긁힌 흔적들’은 십자가의 고난과 예수님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생명나무> 연작은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성육신하신 예수님께 안에 거할 때 시냇가의 심은 나무처럼 우리 인생이 형통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같이 정해숙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은 성경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인정하듯이 성경이야말로 무궁한 창조의 곳간이기도 한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많은 기독교 미술가들이 오해를 하는 것은 성경이나 자신의 신앙을 기계적으로 펼치는 데에 만족한다는 것이다. 시각예술이 일반 언어와 다른 것은 이미지로 변신시키는 데에는 적절한 조형어법과 예술적 상상력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소설가가 작품에 탄탄한 플롯을 갖추어야 한고, 연주가가 작품 해석력을 지녀야 하듯이 화가는 매체 구사력과 함께 스토리텔링의 능력을 갖추어야 공감과 소통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정해숙의 작품이 돋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고유의 조형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관조자와의 커뮤니케이션’(감윤조)을 강조함으로써 내용과 형식 양쪽을 모두 만족시키고 있다. 예술의 밑바탕이 되는 조형 구사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종교적인 작품일지라도 일반의 호응을 얻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다.

 

천국 소망

 

그의 작품은 광야의 삶에 시선을 맞춘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맞추어져 있다. 그의 작업일지에는 이런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내 작품속에 있는 정신적 투영의 공간은 영혼의 소망을 함축하는 공간이다. — 모든 고난과 역경의 삶의 여정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치유해주시며, 우리가 나아갈 길을 인도해주시는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동행을 하면서 모든 것을 극복해내고, — 천국으로 향해 힘차게 나아가길 소망하는 마음을 담았다.”(작가노트)

이 말에서 보듯이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건네주고 위로와 치유를 안겨주며 그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천국의 메신저’가 되길 소망한다.(그림 4) 아야나 매티스(Ayana Mathis)에 따르면 오늘의 작가들은 “기쁨을 당혹스러워한다. — 절망과 소외와 암울함이 인간조건의 가장 의미있고 흥미로운 술어라고 결정한 듯하다. 권태와 종말론적 불안속에서 우리는 — 충만한 삶을— 미심쩍어 한다.” 희망의 상실은 현대문화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현대인의 의식속에 자리한 불만족과 공허함이 실은 ‘소망의 상실’에 기인한 것이다. 일상의 삶속에서 정말 희망이 사라진 것같은 생각이 들지만 역설적으로 정해숙은 희망의 건재를 말한다. ‘미래의 전주곡’이랄까, 그가 소망하는 세상, 즉 천국의 이야기를 펼쳐 보임으로써 말이다. 18세기 철학자이자 목사였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천국은 사랑의 세계다”는 설교에서 기독교의 희망을 구체적으로 전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충만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충만하게 흘러넘치시며 다함이 없는 사랑의 원천이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며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불변하시며 영원한 사랑의 원천이다. 천국에서조차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한 사랑의 샘이 흘러나온다.– 천국에서는 사랑의 원천이 흘러넘쳐 사랑과 기쁨의 시내와 강을 이루어 모든 삶이 마시며, 헤엄칠 수 있다. 사랑이 흘러넘쳐 사랑의 바다를 이룬다.”

우리는 형형한 빛과 찬란한 물빛으로 직조된 그의 그림에서 충일함을 느낄 수 있는데 그 충일함이 에드워즈가 말한 천국의 묘사와 맞닿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이 사랑스러운 것처럼 그의 그림은 천국의 모형을 따라서 사랑스럽게 보이도록 계획된 것같다. 그의 작품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빛 역시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와 천국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로 흘러간다. 이를 통해 작가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없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도 없으며, 모두가 사랑하기 때문에 모두 각자 서로의 사랑스러움을 보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서로 사랑하는 그런 ‘영광스러운 사랑의 나라’(조나단 에드워즈)를 형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해숙의 그림을 보면 ‘희망의 섬광’이 반짝이는 것을 보게 된다. 이는 대부분의 현대미술가들이 ‘지금 여기’의 미망(迷妄)에 사로잡혀 기쁨없는 주연(酒宴)을 탐닉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문제는 우리가 소망을 잃어버렸다는 데에 있다.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가 말하듯이 ‘존재의 거대한 고리’를 잃어버린 사회는 ‘소망의 무지개’를 저버리게 된다. 그런 모습은 비단 예술계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작가는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기꺼이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자 한다. 우리 안의 가장 깊은 갈망을 일깨워주고 다시 북돋아주는 것, 그리고 이것이 채워질 때의 행복감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정해숙 그림의 요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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