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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在的 리듬의 對比의 世界

鄭海淑의 個人展에 부쳐

 

일찌기 인간을 두고 「기하학적 동물」이라고 한 사람은 이른바 순수주의(Purism)를 들고 나온 오장팡과 쟈느레(르 코르뷔지에)이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정신은 기하학을 창조했다. 기하학은 질서를 정립하려는 우리의 깊은 욕구에 대응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인간 정신이 기하학을 창조했다고 했을 때, 그것은 또한 기하학적 패턴이 인간의 사고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며, 그것은 동시에 합리적이자 동시에 비(非) 대상적, 추상적 사고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기하학적 패턴이 기본을 이루며 그 무한한 변주(變奏)에 의해 하나의 「우주」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鄭海淑의 회화는 그 기하학적 패턴의 기본 단위를 일단은 네모꼴과 동그라미에 두고 있다. 그리고 그 다양한 대비적(對比的) 관계에 의해 화면의 정연한 리듬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대비의 관계는 비단 두 패턴의 그것으로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시각적인 차원에서 볼때 그 관계가 감각적인 음양(陰陽)의 규칙적인 반복 내지는 확산에 의한 기하학적 화면 구성의 요소로 머무는 것이기는 하되, 더 나아가 그것은 실체와 그 잔영(盞影)의 대비 및 통합이라는 보다 원천적인 질서의 「투영(投影)」의 세계이기도 하다.

화면의 구성 요소로서의 대비적 관계, 그것은 또 한편으로는 극소(極小)와 극대(極大), 부분과 전체와의 그것이다. 그리고 이 양자는 서로 겹치며 또 스스로 증폭되어 가면서 일종의 다중적(多重的)인 공간을 형성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평면적이자 동시에 이중 삼중의 깊이있는 공간이며 또한 정신적 투영으로서의 투명한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도 엄밀하고도 정연한 내재적 리듬에 의해 통제되어 있는 공간이다.

鄭海淑의 작업은 화상풍으로 볼때, 옵티컬한 기하학적·구성적 추상에 속한다. 그러나 음양이 서로 교차하는 기본 단위로서의 동일 패턴(네모꼴)의 규칙적이고 반복된 구성은 단순히 시각적 착시(錯視) 효과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 물론 거기에는 화면 구성상의 시각적 변주, 예컨대 구성적 소단위 또는 부분과 그것을 통합하고 있는 하나의 전체로서의 화면 구성 상호간의 비례관계의 변주 등이 치밀한 계산에 의해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또 근작에 있어서는 그 비례관계가 네모꼴과 동그라미의 그것으로 이행해 가고 있기도 하거니와, 그것이 鄭海淑의 작품으로 하여금 또 다른 공간적 구조를 지니게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鄭海淑이 추구하고 있는 세계, 그것은 그와같은 시각적·감각적 세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그녀의 회화에 있어서의 증폭되는 네모꼴과 동그라미의 분할과 통합은 그 다양한 변주와 함께 문한에로 이어닫고 있으며, 그것이 곧 정신적 투영의 마당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형태라든가 색채에 의한 수치적(數値的)인 대비 관계로 그치지 않는 보다 투명한 정신세계를 구현하고 있다는 말이다.

색채만 하더라도 鄭海淑은 청색과 보라색의 순색(純色)과 그 중간색조로 국한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두 순색의 대비를 기조로 하여 화면 전체가 무수한 규칙적인 소단위로 분할되고 있거니와, (결과로서 각 단위마다 세모꼴 또는 마름모꼴로 다시 분할되고 동시에 입체감을 지니게 된다.) 그것이 동일 계열의 중간색조의 도입으로 다시금 커다란 색면으로 구획되고 있다. 구획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가 중첩되며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공간 구성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소단위의 색면 분할이 시각적 착시 효과를 결과하고 또 한편으로는 화면을 크게 구획하고 중첩된 색면은 정중동(瀞中動)의 은밀한 내재적 리듬과 함께 무한에로 확산되어 가는 투명한 공간을 낳는 것이다.

鄭海淑의 작품 하나하나가 면밀한 계산과 치밀하고도 지속적인 작업을 요하는 것이라 함은 분명하다. 일종의 수치적(數値的)인 정확성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고인(古人)이 이야기했듯이 수치에의 맹목적인 예속은 예술의 죽음밖에는 의미하지 않는다. 수치적 원리에 생명이 깃들기 위해서는 고도의 정신적 긴장과 함께 보다 순화된 감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비로소 규율 속의 자유로운 창의(創意)가 가능하며, 鄭海淑의 작품에서 우리는 바로 그 두 요소의 균형을 보는 터이다.

그와 같은 균형의 세계가 물론 하루 이틀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鄭海淑의 경우, 그녀는 이미 대학(弘大) 재학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는 작업을 일관되게 계속해 오고 있다고 했다. 그것도 시종 밀도 있는 질감의 유채로 일관하여 그것이 오늘의 순도 높은 투명성을 획득하기에 이르고 있다. 물론 그녀의 오늘의 작품을 두고 작가적 성숙을 이야기 하기에는 아직은 이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성숙의 가능성은 이미 근작에서 능히 인지할 수 있다고 생각되며, 바라건대 오늘의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그 성숙이 가까운 장래에 성취되기를 기대한다.

 

1992. 2.

이일(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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